늦여름 풍경. 사진=전의영

더위가 그친다는 절기 처서(處暑)를 앞두고 장마철처럼 비가 내려 걱정이 많았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라는 말처럼 처서에 비가 오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못해 썩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조상들의 지혜 때문이다.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열대야도 문제이다.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 해서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는데도, 흠뻑 내린 비에 쑥쑥 자라나는 마당의 잡초는 그저 한숨을 부른다. 얼마 전 입추 절기만 해도, 도저히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폭염이 신기하게 잦아드는 듯해서 절기 마법이 이번에도 통하나 싶었으나, 절기와 상관없는 더위는 에어컨 앞으로 달려가게 만든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잘 알려진 속담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모기 극성이 사라질 때도 됐다 싶은데, 풀숲에 붙어있던 모기는 저녁만 되면 떼거리로 달려드는 통에 잠시도 마당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아침저녁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되고 파리와 모기의 극성이 사라진다던 그 말도 오늘만큼은 허당이다.

24절기는 고대 중국 주나라 때 화북 지방에서 만든, 농사를 위한 오래된 시간의 지혜이니, 그 절기가 만들어진 시절의 기후와 지금 기후 사이의 틈새를 살피더라도, 오늘따라 절기의 배신감이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절기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그 리듬을 믿고 기대어 살아왔다는 말이다. 수천 년을 이어온 약속이 하루아침에 어긋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조상들이 남긴 말이 여전히 통할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 오늘의 서운함도 생겨난 것일 테니까.

어쩌면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계획한 대로,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날들 앞에서 종종 배신감도 느끼지만, 그 감정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다음을 믿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그래도 두어 달 뒤 두터운 패딩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오싹하다.

 

가을 갈대숲에서. 사진=전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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